마음에게 말걸기
마음에게 말걸기
대니얼 고틀립 지음
문학동네 / 2009년 6월/ 235쪽 / 11,000원
▣ 저자 대니얼 고틀립
심리학자, 임상심리의, 가족문제치료전문가. 고교시절부터 겪은 학습장애로 낙제를 거듭하여 대학을 두 번 옮긴 끝에 템플 대학교에서 학습장애를 극복하고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를 그는 “마치 전구에 불이 들어온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스물세 살에 대학에서 만난 아내와 두 딸을 낳은 이후 젊은 정신의학 전문가로서 중독 증세 분야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던 중 서른세 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척추손상을 입어 전신이 마비되고 만다. 그 후로 극심한 우울증과 이혼, 아내와 누나, 부모님의 죽음을 차례로 경험하면서 삶의 지혜와 통찰력, 타인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갖게 된다.
사고가 일어나고 이십 년이 흘러 둘째딸이 낳은 그의 유일한 손자 샘이 14개월 되었을 때 자폐 진단을 받자 그는 손자에게 세상과 인생에 대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CNN을 비롯한 언론과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모두가 깊이 공감할 인생의 지혜로 가득 차 있다”고 격찬한 그의 첫 책 『샘에게 보내는 편지』는 11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심리학자로서, 또 필라델피아 라디오방송 WHYY-FM의 상담 프로그램 ‘가족의 소리’의 진행자 등 전신마비 장애인이 된 이후 오히려 더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머쥔 그이지만, 지금 그의 명함에는 아무런 타이틀 없이 오직 ‘사람Human'이라고 적혀 있다. 『마음에게 말걸기』의 인세 전액은 어린이 건강재단과 자선단체에 기부된다.
▣ Short Summary
2007년, 자폐증을 앓는 손자를 위해 써내려간 편지가 수많은 한국 독자들의 찬사와 공감을 자아낸 바 있다. 세상과 타인을 향해 마음을 닫아건 우리 안의 ‘샘’을 발견하고, 인생에 대한 아름다운 성찰과 사랑에 눈 뜨게 해준 베스트셀러 『샘에게 보내는 편지』의 작가 대니얼 고틀립. 자폐증 손자의 마음을 열기 위해 눈물과 웃음 섞인 32통의 편지를 써내려갔던 그가 이번에는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느라 정작 자신의 마음은 돌보지 못하는, 그러나 혼자 남겨지면 외로움과 절망의 방에서 갇혀 힘겨워하는 당신의 마음을 열기 위해 돌아왔다.
서른세 살, 한창 나이에 사고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람들의 가슴을 올려다보며 살아온 심리학자, 대니얼 고틀립. 이 책은 그가 필라델피아 라디오방송 WHYY-FM의 상담 프로그램 <가족의 소리>를 진행하면서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를 듣고 치유해 나간 기록이다. 전신마비, 이혼, 우울증, 가장 사랑하는 손자의 자폐증 진단 등 세상이 규정한 불행의 끝까지 가 본 그는 때론 유머러스하게, 때론 천진한 아이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수많은 다친 마음들을 따뜻하게 녹여낸 소통과 공감의 순간들을 들려준다. 가족, 일, 사랑, 꿈 등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 앞에서 길을 잃었을 때, 우리의 가슴속에서 답을 찾는 법을 알려준다.
프롤로그_ 서른셋, 삶이 내게 쉬어가라 말했을 때
1979년 12월 30일, 맑고 쾌청했던 그날은 여느 때처럼 평범하게 시작되었다. 나는 서른세 살의 심리학자로 중독 증세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으며 아름다운 아내와 이제 막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두 딸이 있었다. 아침 7시 30분, 나는 사랑스런 가족들에게 차례로 키스하고, 살짝 언 잔디 마당을 지나 낡고 정든 내 차 도지 다트에 올랐다. 지금 이 순간도 그때 내 발밑에서 사각사각 부서지던 얼음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나는 그 소리를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내가 나의 두 발로 땅을 밟은 마지막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후 나는 펜실베이니아 턴파이크를 달리고 있었다. 운전하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거대한 검은색 물체가 내 차창을 덮쳤다. 그 다음에 기억나는 것은 내가 에프러타 병원에서 깨어났다는 것,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 몸이 전신마비가 되어 있더라는 것뿐.
그렇다. 나는 끔찍한 비극을 겪은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체험했다. 충격, 슬픔, 분노, 공포……. 이 모든 것이 나를 성난 파도처럼 휩쓸고 지나가 내 마음을 폐허로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럽고 두려웠던 것은 세상, 그리고 사람과의 괴리감이었던 것 같다. 그 후 몇 주 동안 나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나의 신념을 꺾어야 하는데도 진정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내게 보통 남자들처럼 사랑을 나누고 아내와 춤을 출 수 있는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내가 간호사와 약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다 해도, 만약 평생을 휠체어에 앉아서 보내야 한다 해도 내가 여전히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뼛속까지 사무치는 소외감과 괴리감을 떨쳐내려는 심정으로, 나는 나 자신과 다른 이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서로 어떻게 행동하고 교감하는지, 이성과 감정이 부딪칠 땐 어떻게 대처하는지, 나는 아무런 판단도, 분석도 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기로 했다.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고, 내 상태가 아무리 이 지경이 되었더라도 여전히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 증명하고 확신해야만 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 내가 그들 가운데 속해 있을지라도 앞으로는 분명 다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지어 내 주치의마저도 내 곁에 있으면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사람들은 나를 대할 때 일부러 명랑한 척 목소리 톤을 높인다거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고, 서둘러 용건만 내뱉기도 했다. 그들은 전신마비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내가 너무 좌절하지 않게 하려 안간힘을 썼고, 그러다 보니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불안정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인간은 어딘가 정상이 아닌 사물이나 사람을 접할 때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 불편하고 불안정한 느낌을 지우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시도한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애쓰는 이들도 있다. 내 상태가 생각만큼 끔찍하진 않다고 설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때로는 절친한 친구들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속으로는 안쓰러워하고 속상해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내가 이렇게 긴장하고 염려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는 너와 나, 우리 모두의 마음이 닫혀 있었다. 모두의 마음속에 근심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마음에 근심이 있는 사람은 괴롭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괴로움을 줄이고 싶어 한다. 나는 내 마음속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근심과 불안은 전염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내 옆에서 불안해할 때면 내 마음 또한 굳게 닫혔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반박하거나 딴생각을 하면서도 듣는 척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들이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해주려 노력하면 할수록 슬프고 외로워졌고,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고가 난 지 6주쯤 됐을 무렵, 물리치료실에 앉아 국방색 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너무 괴로워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런 데서 죽게 될 줄이야.” 그때 내 옆에 앉아 있던 물리치료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아니에요, 댄 선생님. 여기 죽으러 오신 거 아니에요. 살기 위해 오신 거예요.” 물론 어떤 면에서는 그 말이 옳다. 하지만 내 말도 틀리진 않았다. 내가 다시 삶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죽음이란 문제를 다루고 지나가야만 했다. 물리치료사의 형식적인 위로 때문에 나는 지독한 소외감을 느꼈다.
물론 나와 함께 있을 때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는 세상사를 꼬치꼬치 캐물을 힘도 없었으니까. 나는 단지 관찰할 뿐이었다.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들은 내 상태에 대해 묻고 내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이 사는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그들은 그저 나와 함께 있고 싶어했다.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할 때는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이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는 느낌도 어느새 희미해졌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내 곁에 있으면 분명 불안해하지만 자신들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게 그 점을 터놓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걱정할 때조차 스스로 편안해지는 법을 안다. 나는 이들과 함께할 때도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차원의 교감과 소통이 존재했다. 그들이 내 사고로 인해 겪은 불안과 고통을 이야기하면 도리어 내가 그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동정을 느꼈다. 그들은 내 사고를 안타까워하며 흐느꼈고 나는 그들을 두 팔로 꼭 안아주었다.
우리의 인생에 닥친 이런 예기치 못한 비극 앞에서 사람들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이 반응에 따라 나의 반응도 달라진다. 주변 사람들이 불안해하면 나도 불안했다. 그들이 마음을 열고 나를 보살펴주면 나는 편안해졌다. 그리고 그들이 지쳤을 때 내가 그들을 위로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치유했다. 사고 후 그 시간 속에서 나는 감정은 전염된다는 것을 배웠다. 때로는 우리 자신이 느끼지 못한 감정까지도 옮겨진다.
서로의 등 뒤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희망 없는 날의 선택
사고가 난 후 아내 샌디가 응급실로 달려왔을 때, 난 아내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지금 너무 많이 다쳤어. 아무래도 다시는 좋아지지 않을 것 같소.”
이후 나는 아주 오래도록 아주 슬피 아주 많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이 깊은 절망과 무력감 속에서도 나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필요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이런 상태로 딱 2년간만 살아보겠다고 말했다. 더 살지 안 살지는 그때 가서 결정하겠노라고. 그렇게 말해놓고 나니 왠지 내가 내 인생을 주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은 나의 손가락 틈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던 인생이었지만.
그렇게 2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침대로 가서 깊이 숨을 들이쉬며 사색에 잠긴 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누구와의 대화일까? 하나님? 나의 수호신? 내 신념? 어쨌건 그 대화는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그래요. 약속한 대로 여기까지 살았습니다. 만약 당신이 언젠가 걸을 수 있다는 희망만 준다면 어떻게든 살아보겠습니다.” 그때 나는 이런 대답을 들었던 것 같다. “아니야. 희망은 없어. 살거나 죽거나 오직 그뿐이네. 알아서 선택해!”
나는 다시 말했다. “그러면 제가 다시는 아프지 않을 거라는 희망만이라도 주십시오.” 그때 내 몸 상태는 거의 바닥이어서 조금만 더 튼튼해져 온갖 병원균의 침입을 이겨낼 수 있기만을 바랄 때였다. 그러나 그런데도 나는 같은 대답을 들었다. “그렇게 계속 살거나 그게 안 되면 죽어야지. 아마 앞으로도 변치 않을 걸세.” 내 모든 요구에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그 순간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혼란스러웠고 어떻게든 맞서고 싶었다. 내 안의 작은 목소리가 말했다. “이런 젠장, 난 이제 어떻게 살지?”
약속된 2년은 끝났다. 나는 협상을 해보려고 했다. 비상구를 찾고 싶었다. 희망이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아니, 조금이라도 나아질 가능성만 있다고 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런 약속도 없었다. 일말의 희망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나는 삶을 원했다. 내가 대단한 영웅이라서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사실 처음에는 용기만 있다면 목숨을 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삶을 택했다. 아이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 돌이켜보면 인간은 원래 그런 상황에서 삶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삶을 택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나의 위대한 통찰이다. 그리고 그 시절 내가 배운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희망 없음’이라는 선물이다. 나는 언젠가 내가 꿈꾸던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에 삶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기약 없는 희망을 버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을 택했다. 사실 이러한 지혜는 ‘이런 젠장’의 순간이 아니었다면 찾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누구나 하염없는 절망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런 식으로 어떻게 살아가지?” 그러나 나중에야, 그리고 운이 좋다면, 우리는 과거와 같은 삶을 다시 찾을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순간, 희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그 이후의 날들이 우리 인생의 진실임을 알게 된다.
몇 년 전 나는 골전이암 진단을 받은 캐롤라인이라는 여성을 치료한 적이 있다. 캐롤라인은 진단을 받은 순간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테러 당한 기분이었어요.” 즉, ‘이런 젠장’의 순간이다. “그 다음에는 내가 내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지가 보이더군요.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일을 그만두고 싶었어요.”
그러나 사실 처음 암 진단을 받은 후 6개월 동안은 “내가 이걸 안고 이떻게 살아가지?”라는 질문과 씨름하며 보냈다고 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암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의사들의 소견을 들었다.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한 의사가 아무리 치료를 받아도 그녀의 암세포는 퍼지게 될 거란 사실을 전했고 그제야 그녀는 비로소 희망을 접었다. 나처럼, 캐롤라인은 지난날 자신이 누렸던 인생을 되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버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놀라운 통찰을 얻었다. 이제 그녀는 오늘의 삶을 살아간다. 일을 그만두었고 사랑하는 사람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동네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자원봉사도 하고 있다.
희망은 언제나 미래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희망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희망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 내 인생을 바꿔 주리라는 기대 속에 나를 가두어버리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희망 없음이 꼭 절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희망 없음은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며 다음과 같은 삶의 가장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알려준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어디 있는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당신의 마음은 답을 알고 있다
내 안의 다이아몬드를 키워라
누나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삶이 버겁던 시절, 나는 세 명의 남자가 나타나 호랑나비를 만드는 꿈을 꾸었다. 그들이 말했다. “이것은 당신의 영혼입니다. 완전한 인간이 되려면 이 나비를 삼켜야 합니다.” 나는 그들을 보며 이렇게 대꾸했다. “못 하겠어요. 살아 움직이는 나비를 어떻게 삼킨단 말입니까?” “해야 돼요. 그래야만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말했다. 나는 나비를 입에 밀어 넣었다. 하지만 나비가 입 속에서 계속 팔락거리자 얼른 다시 뱉어버렸다. “못 하겠어요! 숨 막힌다고요! 이러다 죽으면 어떡합니까?” “상관없어요. 이것을 삼켜야 당신은 완전체가 됩니다.” 그들이 말했다. 그래서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고 나비가 목구멍으로 거의 넘어가려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그 꿈은 믿음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세 명의 남자가 내게 호랑나비를 삼키라고 했을 때 나는 안 된다고 거부했다.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것을 입에 넣고 꿀꺽 삼키려 했다. 왜 그랬을까? 맹목적인 신념으로? 그들의 말이 그럴듯해서?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 것이었을까?
그런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보다 나는 그냥 되는대로 내버려두려고 했던 것 같다. 나비를 삼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내 목숨이 달려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꿈속에서 나는 처음에는 반항했지만 결국 일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었고 결과가 어찌 되든 나비를 받아들였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완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신성함을 인간성과 결합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종의 신념의 도약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신념의 도약 안에서 우리의 에고는 죽게 된다. 그 나비는 내가 아는 모든 이론, 내가 믿는 모든 것, 때로는 나의 정체성보다도 중요하다.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신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우리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갓난아기와 어린아이를 떠올려보자. 그들은 누군가 자신을 돌봐주고 보호해 주리라는 견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물론 그 믿음은 시간과 경험이 쌓이면서 점점 퇴색하고 바로 그때부터 그들은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떤 사상이 될 수도 있고 종교 혹은 사회시스템이 될 수도 있다. 이들은 모두 불안과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해준다.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마음 편히 쉴 곳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해답은 우리 안에 있다. 그러나 나만의 답을 믿을 수 있을까?
내가 나를 믿지 않을 때, 우리는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불안이라는 악마를 저지하기 위해 나를 떠나 바깥에서 기댈 곳을 찾는다.
내 둘째 딸 데비는 대학교 2학년이었던 스무 살 때 나에게 내면의 믿음에 관해서, 또 딸아이 자신과 나에 대해서 아주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데비는 그때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살면서 이제까지 겪었던 트라우마들이 한꺼번에 딸아이를 덮쳤다. 사실 나는 데비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이런 일이 생길까봐 조마조마했다. 데비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암 투병을 지켜보아야 했고 아빠의 전신마비에 적응해야 했으며 우리 가정에 닥친 여러 불행과 혼란을 참아내야 했다. 아이 엄마와 내가 이혼한 다음에는 엄마의 변덕과 무신경함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을 겪으면서도 데비는 적어도 겉으로는 언제나 ‘완벽한 아이’의 모습을 유지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자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데비의 룸메이트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데비가 너무 걱정된다고 말했다. 데비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학교를 잠시 휴학한 후 집에서 쉬다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 회사의 인턴사원이 되었다. 데비는 직장 사람들과 밤늦게까지 어울렸고 내게는 그런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데비에게 내가 많이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렸고 힘이 되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여느 아이들처럼 데비도 처음에는 언짢아하며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괜히 주변에서 더 난리라며 내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졌고 어느 날 데비는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로 나에게 말했다. “아빠, 나는 다이아몬드인데 내 안에 자꾸 악성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시점에서 나는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이 대처하는 방식대로 행동했다. 내가 아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 종양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나는 데비를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끌고 다녔다. 처음에는 최고의 심리치료사와 정신과의사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의견을 묻고 ‘올바른 접근법’을 구했다. 데비가 2학년이 되어 다시 학교로 돌아가자 나는 계속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아이를 도우려했다.
바로 그즈음 데비의 학교가 있는 워싱턴 D. C.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데비는 내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깐 만나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약속 시간을 정했고 내가 도착했을 때 아이는 식당 옆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아이를 보니 걱정이 되어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이의 얼굴이 너무 까칠하고 기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딸은 힘을 내서 내 손을 꼭 잡더니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빠, 아빠는 제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셨어요. 그 점, 무척 감사해요. 하지만 이제 제 인생은 제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요.”
나는 울었다. 슬퍼서 울고, 무력감과 두려움 때문에 울었고, 또 안심이 되어 울었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일 년 전 자신이 종양 속의 다이아몬드라고 했던 딸의 말을 떠올렸다. 데비가 “이제 제 인생은 제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요”라고 말했을 때 나는 다이아몬드가 반짝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부모로서 내가 할 일은 그 다이아몬드를 언제까지나 지켜봐주는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우리가 미처 보고 듣지 못할 때에도 우리 안의 다이아몬드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돌보고 지켜주고 이 모든 혼란 속에서도 그 믿음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우리 사회는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될 수 있다’는 식의 표어를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내 안의 다이아몬드를 키워라.” 이것은 성취나 자기계발에 관한 말이 아니다. 내 안의 봉오리를 꽃피우는 것, 그리고 더 나은 나 자신이 되는 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스물한 살짜리 딸의 말에서, 또 자신의 인생은 제 손에 달렸다는 아이의 확신 속에서 나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했던 선택의 약속을 떠올렸다. 데비는 자신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내게도 또 자기 자신에게도 답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생은 제 손으로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뇌했던 것처럼 데비도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나처럼,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데비는 삶을 택했다. 그 순간에는 그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삶을 선택했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약이다. 내게 주어진 인생이 아니라 진짜 나의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약속이며 내 안의 다이아몬드를 키우기 위해 무엇이든 해내겠다는 다짐이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자기 민족을 이끌고 나와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났던 모세는 우리와 같은 길을 걸었다. “나는 믿음의 걸음을 택하여 그것이 이끄는 대로 가리라.”
모든 환자 안에는 그를 고칠 수 있는 의사가 살고 있다
인생이란 -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인생이란 마치 이렇게 시작되는 농담과도 같다. “이봐, 나한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거든. 어떤 것부터 들을래?”
우리의 출생 단계에서 좋은 소식이란 그 상상을 초월하는 경쟁률을 뚫고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는 것일 게다. 나쁜 소식은 자기들이 대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잘난 척만 하는 부모들의 손에 자라게 될 확률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또 이어지는 좋은 소식은? 많은 사람들이 가정에서 사랑과 안정을 느끼며 자란다. 반면 또 다른 나쁜 소식은 우리 중 거의 절반 정도가 부모의 이혼을 겪고 아버지와 많은 시간 떨어져 살아간다는 점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부모의 이혼을 두 번씩 겪기도 한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모든 일에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함께 따라다닌다. 사춘기, 연애, 결혼, 육아, 그리고 노화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모든 단계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다. 때로는 내가 당한 사고와 같은 결정적인 트라우마조차도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같이 몰고 온다. 나는 지금 아프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가슴 깊은 곳에서 울화가 솟구치고 우울할 때가 있다. 하지만 전신마비가 된다는 것에도 분명 좋은 점은 있다. 바로 장애인을 위해 마련된 최상의 주차 공간이다. 그리고 가장 좋은 점은 뭐니뭐니 해도 화장실에 가기 위해 한밤중에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오늘 밤 여러분이 졸린 눈을 비비며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침대에서 세상 모르게 푹 자고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진지하게 들어가 보자. 장애는 지금의 고틀립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지난 30년 동안의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목이 부러졌을 때부터 비로소 내 영혼이 숨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워낙 출발선부터 다르기 때문에 굳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만약 이런 사고가 없었더라면 나는 결코 지금의 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몇 년 전 한 젊은이가 어머니와 함께 내 상담실을 찾았다. 그는 어딜 가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큼 잘생긴 열일곱 살의 청년으로 전신마비가 된 지 3개월이 되었다고 했다. 당연히 그 젊은이는 충격과 우울에 휩싸여 있었고 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런 종류의 상담을 여러 차례 해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길잡이를 찾고 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들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싶어 했다.
상담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그 두 사람의 고민에 대해, 두려움에 대해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배뇨관 바꾸기, 변보기, 휠체어 수리하기 등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다음에는 어머니에게 자리를 피해달라고 한 후 젊은이와 나만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사고 이후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성적인 문제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나는 그에게 우리는 눈과 목소리와 손가락과 입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섹스는 아마 그 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근사할 것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꼭 끌어안고 있으면 거의 오르가슴에 도달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청년과 내가 따로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 어머니가 들어왔고 나는 그들에게 우리 집을 보여주었다. 화장실을 어떻게 사용하고 침대에는 어떻게 올라가는지 보여주었고 간병인이 머무는 곳도 보여주었다. 공간을 분리해야 사생활을 침해받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부엌에서 요리 시범을 보였다. 그러고 나서 내가 직접 운전하는 밴으로 젊은이를 데리고 갔다. 차를 보는 순간 그의 눈이 반짝였다. 어머니와 아들은 처음 상담실에 들어올 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고맙다고 말하며 그들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들은 미래의 잠재된 행복을 보았던 것이다. 나도 그들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들이 필요한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어머니와 아들은 상담실에서 나갔고 문이 닫혔다. 나는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이 잘생긴 젊은이가 앞으로 겪어야 할 수많은 고통을 생각하며 울었다. 그리고 그가 느낄 혼란과 고독의 날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나는 그가 느끼게 될 갈망, 절대로 충족되지 않을 그 욕망들을 떠올리며 울었다. 나는 그 청년을 위해 울었고 나를 위해 울었으며 마침내 우리 모두를 위해 울었다.
이런 느낌을 솔직히 말하지 않았으니 내가 거짓말을 한 셈일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 청년과 그의 어머니와 함께 집안을 돌아다닐 때는 그런 감정을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 말은 모두 진실이었다. 내 인생은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소중하다. 나는 내 인생의 거의 모든 면을 사랑한다. 나는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감사와 경외감과 사랑을 느끼며 살아간다. 내 인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축복이다.
그렇지만 역시 나는 많이 슬프다. 때로 헤어날 길 없는 절망감을 느낀다.
나이가 들고 내 요로도 점점 지쳐가면서 내가 지금 이 인생의 마지막 장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도 역시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나쁜 소식은 뭘까? 더 이상 우리 아이와 손자를 안아줄 수 없다는 것. 내 마음을 이토록 부자로 만들어준 수많은 사람들과 나를 행복하게 해준 모든 것들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좋은 소식은? 더 이상 휠체어를 안 타도 되고 배뇨관을 끼우지 않아도 되며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 등등 셀 수 없이 많다. 그때는 사람들이 흥겹게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고통 받지도 않고, 또 애써 태연한 척 연기하지 않아도 되리라.
요가에 이런 말이 있다. “경험하는 것은 사는 것이다. 설명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다.”
인생을 온전하게 살아갈 때 나는 깊은 고통과 결핍감마저 느낀다. 나는 내 몸이 아주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악화되는 것을 느낀다. 죽음이 한쪽 볼에 키스를 하고 그와 동시에 삶이 다른 한쪽 볼에 키스를 하는 것이 느껴질 때 나는 완전히 깨어나 생생하게 살아가며 절망과 허무와 고통을 느끼는 동시에 사랑과 감사로 충만해진다. 나는 다른 사람처럼 내 두뇌와 육체와 영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안다. 어쩌면 유일한 차이점은 내가 이 모든 것에 조금 더 예민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또한 좋은 소식이자 나쁜 소식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죽음이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동시에 가져다줄지라도 나는 친구들에게 내 장례식에서 꼭 이렇게 말해달라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댄도 자기가 관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상당히 열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