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와 평화의 숨소리

삼현파(판도판서공파)에 대하여

초보산타 2014. 2. 10. 00:58

 

0.삼현파(판도판서공파)

 

이조 이십이대 정종대왕(서기 1777년)께서 김해김씨(金海金氏)를 가리켜 삼한갑족(三漢甲族)이라 하시며 절효(극일), 탁영(일손), 삼족당(대유) 세현인을 가리켜 청도 三賢이라 하였으며, 한 집안에서 四代間에 三賢人이 났다는 일은 古來로 드문 일인고로 이로 인해 삼현파(三賢派)로 정하였다 한다.수로왕이 즉위 7년에 아유타국(현재 인도 중부지방의 고대국가)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 33~189.3.1)을 왕비로 맞이하여 10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로 왕통을 잇고 두 아들은 왕비간곡한 요청으로 왕비의 성인 허(許)씨(태인 허씨)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7아들은 불가에 귀화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 이씨가 있으며 세 성씨가 다같은 혈족이라며 종친회도 '가락중앙 종친회'로 하였다.

김해 김씨의 중시조는 수로왕의 12세손인 김유신(金庾信)장군이다. 김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신라의 장군이며 각간(角干)인 김무력(武力)이고, 아버지는 무열왕의 장인이며 당대의 이름난 장군인 김서현(舒玄), 어머니는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 계파 ]

계파는 금녕군파를 비롯한 142개파가 있으며 김유신의 직계종파인 3개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경파(京派 - 영견, 영서, 영정, 영순) : 고려의 김목경(牧卿)을 중시조로 한다. ·

사군파(四君派 - 극조, 완, 여수, 세기) : 목경의 동생 김익경(益卿)이 중시조다. ·

삼현파(三賢派 - 극일, 일손, 대유) : 김관(管)을 중시조로 한다.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일세조(一世祖)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學校)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극일(克一)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극일(克一)의 아들 맹(孟)은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1486년(중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일손(馹孫)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巨儒)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 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李克墩)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 여 사초(史草)를 살피게 되니 일손의 스승인 김종직 (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 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일손은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이 목(李 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金宗直)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 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일손(馹孫)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中宗朝) 영의정(領 議政) 남 곤(南 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 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 고 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대유(大有)는 일손(馹孫)의 조카이 며 준손(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叔父) 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父子)가 함 께 호남(湖南)에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 足堂)에서 73세로 일생(一生)을 마쳤다. 일손(馹孫)의 증손(曾孫) 언유(彦諭)는 고양(高陽)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孝行)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 여 공사(公私)의 비(碑)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彦諭)의 아들 현성(玄成)은 광해 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1. 김수로와 함께 마지막으로 나온 김말로왕은고성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2. 근원이 다른 김해 김씨가 있는데 임진왜란때 왜장 김충선이 조선에 귀화하여 성을 하사 받은 김해(우록) 김씨가 있다. 삼현파 조 관은 고려 충선왕때 판도판서를 역임했고, 왕에게 간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많은 공을 세웠으며, 조선에서는 그의 5세손 극일이 유명했다. 극일은 일찍부터 세종때 조정으로 부터 효자정문이 세워졌고, 그의 둘째아들 맹은 세종때 급제하여 집의를 역임했고, 맹의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올라 당대의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김씨삼주>라 불리웠다.

이밖의 인물에는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功)을 세운 조선의 명장 경서(景瑞)와 조선의 화가중에 제 일인자로 꼽히는 홍도(弘道)가 있다.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여 중국어(中國語)에 능통했던 덕승(德承),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예직(禮直), 조선 풍속화의 조종(祖宗) 이유명했고, 충효정려(忠孝旌閭)를 사액(賜額)받은 진희(晋熙)와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천택(天澤) 등이 명문거족(名門巨族)의 김해 김씨(金海金氏)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892,328가구, 3,767,0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0.항렬표

始祖

67

68

69

70

71

72

73

74

75

76

77

78

79

80

81

金寧君派
경파(京派)

51大파조목경

17현鉉

18제 濟

19식植

20 현顯

21 배培

22종鍾

23태泰

24영榮

25겸謙

26재載

27진鎭

28호浩

29근根

30익益

31용用

板圖判書公派
삼현파

(三賢派)

49大파조관

19
67



(창)

 

 

 

20
68



(두)

 

 

 

 

21
69

 

(용)

 

 

 

22
70

 

(곤)

 

 

 

23
71

(진)
(종)

 

24
72



(수)

 

 

25
73

(상)
(동)

 

 

26
74

(환)
(희)

 

 

27
75

(규)
(기)

 

 

28
76

(석)
(호)

 

 

29
77

(영)
(락)

 

 

30
78

(주)
(식)

 

 

監務公派
사군파(四君派)

51大파조익경

17석錫

18태泰

19상相

20현炫

21재在

22호鎬

23영永

24식植

25형炯

26규奎

27용容

28순淳

29동東

30환煥

31기基

본인은 삼현파 시조로부터는 70대손이며 중시조로부터는 22대손임(나의 손주녀석의 돌림자는 수)